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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소와 고발의 프레임

-아셰르 인트레이터

스가랴서 3번째 장을 보면, 스가랴 선지자가 그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예호슈아 (여호수아)에 관한 환상을 봅니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예루살렘의 회복을 둘러싼 역사적인 사건
  2. 메시아의 성육신 이전 모습 (이름이 동일함: 예슈아=예호슈아)
  3. 사탄적 고발과 참소에 대한 보편적인 교훈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세 단계입니다. 대제사장은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자로 보입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그 앞에 서 있습니다. 사탄은 그 옆에 서서 그를 고발합니다.

스가랴 3:1-2
וַיַּרְאֵנִי אֶת-יְהוֹשֻׁעַ הַכֹּהֵן הַגָּדוֹל עֹמֵד לִפְנֵי מַלְאַךְ יְהוָה וְהַשָּׂטָן עֹמֵד עַל-יְמִינוֹ לְשִׂטְנוֹ;  וַיֹּאמֶר יְהוָה אֶל-הַשָּׂטָן יִגְעַר יְהוָה בְּךָ הַשָּׂטָן…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그 사탄”은 타락한 천사의 이름으로 (힐렐 벤 샤하르 [루시퍼- 이사야 14:12]), 그가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 이름이 사탄으로 바뀐 것입니다.

사탄은 히브리어로 원수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동사나 동명사에서 어근 ㅅ-ㅌ-ㄴ은 ‘고발하다’ 혹은 ‘반대하다’라는 뜻입니다.
“그 사탄”은 참소/고발하는 자입니다. 그는 천사 사탄입니다.

사탄이란 인물은 예호슈아를 비난하거나 반대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사로 “그를 사탄하다”라고 나옵니다. 사탄은 거기에 서서 그를 “사탄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대부분의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발하다의 의미입니다.

이 시기에 유대인들이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반대하는 서신이 있습니다. 이 서신은 그들을 고발하는 것으로, 아마도 에스더서의 하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에스라 4:6에서 시트나(ㅅ-ㅌ-ㄴ)의 서신, 곧 고발하는 편지라고 합니다.

사탄이라는 이름은 원수, 반대 혹은 고발하는 자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의 주요 활성 성분은 고발 혹은 참소입니다. 마귀는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라고도 일컬어집니다.

요한계시록 12:10
עַתָּה בָּאָה יְשׁוּעַת אֱלֹהֵינוּ, גְּבוּרָתוֹ וּמַלְכוּתוֹ וּמֶמְשֶׁלֶת מְשִׁיחוֹ, כִּי הֻשְׁלַךְ שׂוֹטֵן אַחֵינוּ הַמְקַטְרֵג עֲלֵיהֶם לִפְנֵי אֱלֹהֵינוּ יוֹמָם וָלַיְלָה.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여기서 참소하는 자 혹은 참소를 의미하는 헬라어는 카테고르인데, 이것은 히브리어로 “검사/검찰관”로 사용됩니다. 사탄을 참소하는 자로 언급한 곳은 스가랴 3장과 욥기 3장입니다.

(카테고르는 신약에 38번 나오는데 33번은 예슈아 혹은 사도들은 비난했던 이들을 가리키고, 2번은 모세에 의한 고발이고 [요 5:45], 2번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대한 것이며 [요 8:6], 1번은 우리의 양심에 관한 것입니다 [롬 2:15].)

요한계시록 12장은 사탄이 모든 형제들에 대한 참소의 근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탄은 예슈아와 하나님의 왕국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참소를 조장합니다.

의롭게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끊임없는 쏟아지는 마귀적인 참소로 고통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일입니다.” 주님을 더 섬길수록 더 많은 참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비난들은 다른 이들에 의해 (흔히 선의의) 목소리를 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난들 뒤에 있는 영적인 에너지는 사탄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사탄은 바로 형제들을 고발하는 자입니다.

물론 이것이 비판과 시정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죄를 짓고 실수도 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실수를 직면할 때는, 반드시 겸손과 분별력으로 각각의 비판을 객관적으로 저울질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다른 이들의 죄에 맞서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한편으로는 반드시 죄에 맞설 수 있는 도덕적 용기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마귀적인 비난에 동조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예슈아께서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대한 당신의 반응에서 죄와 비난에 대해 완벽한 균형을 보여주셨습니다 (요 8:1~11).

천사들의 3분의 1 가량이 죄를 짓고 사탄을 도우며 섬기고 있습니다 (계 12:4). 안타깝게도, 인류의 높은 비율 역시 죄 짓고 비난하는 데에 일조하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마귀에게는 성도들을 고발하기에 충분한 “조력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그 대열에 합류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문제는 오늘날 SNS의 급속한 증가로 더욱 악화되어왔습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여주는 짧은 영상은 “바이러스처럼 전염성을 가진” 영상으로 바뀌어 순식간에 기하급수적으로 퍼질 수 있습니다. 험담, 나쁜 소식, 비난 등은 언제나 “재빠른 날개”를 달고 전해졌지만, 오늘날은 홍수처럼 더 불어났습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의 이러한 현상을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계 12:15).
우리는 마귀의 거짓된 미혹과 죄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성도들을 참소하는 마귀의 비난에 동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고발이 어려운 이유는 대개 거기에 진실의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실수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성도들이라도 실수할 수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슈아 앞에 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트집잡아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눅 20:20).
우리는 실제로 누군가의 자격을 박탈하고자 할 때, 분별을 하고 있다고 자주 생각합니다. 스스로 누군가에 대해 “분별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의 자격을 뺏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쉽게 다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프레임에 집착하게 됩니다. 마이크 비클은 이것을 마귀의 프레임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에게 5%의 오류가 있으면, 마귀는 그에 관한 부정적인 참소의 관점이 전체인 듯 보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잠재력을 보십니다. 다른 관점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5%인 원수의 관점을 알고자 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시각인 나머지 95%는 왜 보지 못할까요? 진짜 그 사람이 아닌 것 말고, 그 사람이 진짜 누구인지를 이야기하며 기뻐합시다.

(마이크 비클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서는 “중간쯤”, 곧 마귀의 프레임보다는 낫지만, 하나님의 관점에는 못미치는 그런 시각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 사람 옆에 서서 참소하는 사탄처럼 되지 맙시다. 여호와의 천사는 참소하는 사탄을 책망했습니다. 여호와의 천사처럼, 사탄적인 참소에 대해 책망하는 자가 됩시다.

5%의 부정적인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합시다. 그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95%를 찾아서 그 동일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야기합시다.

우리의 친구들이나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우리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검사 역할을 하지 맙시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변호인, 곧 파라클레토스이신 예슈아처럼 우리도 그렇게 됩시다 (요일 2:1). 예슈아께서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믿으면, 예슈아의 보혈에는 모든 고발을 취소할 능력이 있습니다.